제7회공연 <벽화 그리는 남자>

1996. 1. 23-2. 11
문예회관 소극장

출연: 서희경/나/김인곤
    강화정/내레이터
    정성호/남자

연극은 객석 한쪽의 남자가 책을 읽고, 무대 위 스크린에 내레이터가 집을 나와 거리를 지나 극장에 도착해서 극장 문손잡이를 돌리는 모습이 투사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곧 이어 내레이터가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고 나-김인곤이 생전에 썼던 시나리오의 일부를 읽는다. ‘공연’이라는 허구의 이야기를 탐독하는 남자와 김인곤의 자살을 계기로 그의 의식을 추적하는 내레이터.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남자와 내레이터에 의해 현재에는 부재 하는 과거의 나-김인곤이 다시 살아나서 일상을 산다. 남자와 내레이터는 김인곤이 알고 지냈던 주변인물이 되어 김인곤의 의식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 점차 함몰되어 가는 한편, 김인곤도 작업 중이던 영화와 영화판 사람들의 이미지를 의식 속에서 선명한 영상적 이미지로 자기증식을 한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인물들이 만나 의식의 공모자로 발전하지만 결국 부재와 실존의 교착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실존하던 인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부재 하는 인물은 남아있어, 그것에 대해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된다. 그러나 연극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익명의 남자(나-김인곤)가 일상적인 상념과 공허, 혹은 권태로부터 자살이라는 탈출구로 빠져나가지만, 현실인 무대에서는 죽음조차도 사건을 일으킬만한 힘을 갖지 못하고, 죽음이란 그저 부재로만 남는다. 그것을 추적하는 내레이터 역시도 이미 부재 하는 남자의 의식에 말려들고, 그녀 자신이 갖는 고유의 결핍감에 그녀 스스로도 일상의 끈을 놔버리는 부재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현미경 속에 드러난 소설의 육체
김윤식/문학평론가

무슨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무방비로 세계에 노출된 까닭일 터인데, 이 거대한 감각기관으로서의 벽화가 동물의 내장처럼 징그럽고 기괴하며 점막질로 엉켜 붙어있다 해도 그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벽화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살아서 숨쉬는 고통의 벽화인 까닭에 그것은 그러하다. <머릿속의 불>만으로써는 결코 이런 벽화의 아름다움(기괴함)은 창출되지 않는다. <인간의 몸의 가장 축축하고 그래서 그만큼 섬세한 막들, 망막, 고막, 각막, 그리고 온갖 점막들>이란 무엇인가. 작가 최수철이 보여주는 이 인간다운 섬세한 점막들이 무려 100개로 분류, 채집되어 있음을 보는 일은 일종의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장편 “벽화 그리는 남자”가 2부작으로 되어 있고 제1부가 24장, 제2부가 26장이어서 도합 50장이라는 뜻만이 아니다. 그런 산술적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세분화가 있었던 것인데, 그것은 활자 크기를 달리하여 따로 이 순수의식을 도려낸 부분과 여러 개의 영화 장면(#로 표시)의 도입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이 그것. 이러한 인간다운 점막들이 김인곤, 정영민, 손태문, 박동일, 강수남, 박중빈, 최봉진, 송여진 등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점막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고통 당하며 발버둥질하는 감각기관이기에 아름답다. 전기뱀장어 모양 음흉하지도, 전기 그 자체 모양 날카롭고 번개처럼 번쩍거리지 않기에 그것은 그러하다. 100개가 넘는,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발버둥질을 하는, 무방비 속의 동물의 급소들이자 삶의 급소가 한결같이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김인곤의 애인이자 영화의 스크립터인 정영민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김인곤의 어릴 적 친구이자 정신적 성장이 유아기에서 정지된 막일꾼인 서성대가 정영민과 김인곤이 동침하고 있는 방에 왔다가 사라지는 장면, 마침내 서성대가 밖으로 나가는 장면, 그리고 그를 찾아 나섰던 김인곤이 허탕치고 돌아와서 본 방의 묘사는 아름답다. 김인곤은 정영민이 커다란 어린애인 서성대를 가슴에 안고 자고 있는 화각을 보는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정통적인 시각에서도 아름답다. 이상의 “종생기”의 <나>에게는 없는 이러한 인간적 요소가 작가 최수철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한 그는 순수한 의식에도 순수한 감각에도 철저하지 못할 것이지만, 이 점이 그로 하여금 아직도 소설 영역에 머물게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한 명의 현상학자나 심리학도를 갖기보다 소설가를 가지길 원하기에 그것은 그러하다.
장편 “벽화 그리는 남자”란 100개가 넘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각각이 <머릿속의 불>을 가진 이들의 의식 및 감각을 다룬 것들이다. 그 섬세한 이미지들의 조각들은 그 자체로서는 무방비 상태로 아름다우나 전체적으로는 추악하고 괴물스럽다. 무방비 상태로 아름다운 조각들이란 영화 한 편 만드는 과정을 이루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각 조각들은 스스로 독립되어 있다. 서성대를 안고 자고 있는 정영민의 모습이 구식의 방식으로도 인상적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힘줄처럼 되풀이되는 자전거를 탄 채 공터를 맴돌기만 하고 있는 인근 점포 배달부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출구를 알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맴돌고 있는 배달부의 행동이 순진무구한 서성대와 등가를 이루면서 김인곤과 정영민을 잇는 끈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구식 소설의 독법도 가능한 점에서 “벽화 그리는 남자”는 선험적 고향 상실의 형식의 흔적을 안고 있다. 이것이 이 작품을 소설이게끔 하는 최소한의 발판이다. 그러한 발판이 100개가 넘게 들어 있다는 점에서 107면 분량의 이 작품은 대하소설보다 벅찬 소설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것은 작가 최수철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기뱀장어와 괴물체인 동물의 급소로서의 감각기관이야말로 작가의 소설적 승부처가 아니었던가. 순수의식에서 순수감각으로 그는 그 승부처를 이동시켜 나아가고 있지 않았겠는가. 설사 선배 이상이 “종생기”에서 냉철하게 시도한 바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 시도란 소중한데, 왜냐하면 선험적 고향 상실의 형식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비판 곧 그 활성화에 대한 실마리가 이 시도 속에서 움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작가 최수철이 거인으로서 다가서는 것은 이러한 소설사적 문맥에서이다. <머릿속의 불>에서 동물의 <급소>를 거쳐 지치지 않고 또 다른 장면으로 옮아갈 것이기에 그는 거인인 것이다.

한국문학, 1993년 9/10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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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최수철
구성/연출: 오경숙

조연출: 박장렬
무대디자인: 오경숙
조명디자인: 김철희
안무: 박호빈
영상연출: 구성우
영상촬영: 추광채
분장: 김미영
무대감독: 남동진
   
 
 
 
 

 

   Repertory 1995 ~ 1999
 10. <딕테>(Dictee)
 9. <뮈토스의 사람들>
 8. <리어 그 이후>
 7. <벽화 그리는 남자>
 6. <Overact>
 5. <벽화 그리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