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공연 <벽화 그리는 남자>

1995.3.21-4.20
Cafe Theatre 굿누리

출연: 서희경/남자/김인곤
강화정/내레이터/여자

이 작품은 최수철 원작 소설 “벽화 그리는 남자”를 텍스트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설 속의 김인곤이 쓰거나 작업중인 영화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시간이나 공간이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나 상상의 파편을 편집하듯이 진행된다.

이 공연의 배우는 남, 여 2명이며, 익명의 남자-김인곤의 자살을 내레이터-여자의 눈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연극은 무대 위 스크린에 여자가 자신의 집을 나와 거리를 지나 극장에 도착해서 문손잡이를 돌리는 모습이 보여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뒤를 이어 실제의 여자-내레이터가 무대에 있는 남자의 방으로 들어온다. 여자는 남자가 쓴 영화 시나리오, 일기 등의 기록 등을 수집함으로써 그의 의식의 흐름을 유추해본다. 그럼으로써 여자는 남자가 쓴 시나리오의 여자-정영민이라는 인물로 점차적으로 함몰되어 간다. 그 시나리오 상에서 여자(현재의)와 남자(과거의)는 의식의 공모자로 발전하면서, 또한 각자의 개별적인 사고의 주체로써 자살의 전모를 밝힌다. 그러나 연극 속에서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익명의 남자가 일상적인 상념과 공허, 혹은 권태로부터 자살이라는 탈출구로 빠져나가지만, 현실인 무대에서는 죽음조차도 사건을 일으킬만한 힘을 갖지 못하고, 죽음이란 그저 부재로만 남는다. 그것을 추적하는 여자-내레이터 역시도 이미 부재 하는 남자의 의식에 말려들고, 그녀 자신이 갖는 고유의 결핍감에 그녀 스스로도 일상의 끈을 놔버리는 부재로의 탈출을 감행하고 만다.

이 연극은 공연 중간에 실제로 16mm 영화를 도입하여 인물 의식의 표현의 폭을 넓히고, 관객들의 상상의 공간을 넓히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는 그 동안의 관습으로부터 탈피하여 보다 다각적인 시간적, 공간적 개념의 표현을 시도한다. 만약 실제의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가상의 상대로써 만난다면? 또, 과거의 그가 현재의 그녀를 자신의 상상 속의 인물로써 만난다면? 이러한 흥미로운 질문들은 독자적인 기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특정한 기호라는 여과지로 걸러서 나온 이미지의 효과로 실존과 부재의 혼돈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그럼으로써 본래의 연극이 갖는 마술성을 높이고 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위험한 길
소설과 소설쓰기 의미 다시 생각게 해
김경수/문학평론가

세상을 재현하는, 혹은 소설적으로 구현하는 특정의 방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러 이미 많은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어서 정착된 현실묘사의 대체적인 룰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그 방식의 보편성을 비준해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가 변하고 인간 삶의 모습이 바뀐 마당에서 이미 누군가가 갔던 그러한 세게 인식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상투어의 세계에 스스로의 인식을 매몰시키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는다. 해서 진정으로 소설의 운명과 맞선 작가는 이미 닦여진 그런 길을 버리고 자신이 판단하기에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묘사의 기법과 세상을 보는 나름의 창을 가지거니와, 다소 좁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최수철이란 작가도 그 극단의 길을 추구하는 작가다.
“벽화 그리는 남자”라는 최수철의 소설이 나왔다. 그의 다른 소설들이 그렇듯 이 작품도 독자들의 용이한 접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소설에서도 기존의 소설들과는 전혀 이질적인 자기 반사적 묘사가 지배적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소설에서는 우연한 기회에 영화 조감독의 역할을 떠맡은 인물이 일종의 영화기법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식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내보이는 등의 기법까지 동원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소설에서 일컫는 벽화는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간직한 상태에서 영위되는 인간 삶의 전체적 모습인 것으로 이해되는 데, 다시 소설에서 인물이 내보이는 의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그 벽화가 쉽사리 그려질 수 없으며, 또한 그려진다고 해도 추상화로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을 하게 된다. 그것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중심인물의 의식이 결코 명료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개연적인 측면에서 세상에 대한 묘사가 어차피 그런 운명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해도, 소설의 문제는 다소 다르게 천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최수철의 작업이 갖는 하나의 문제성을 이번 소설이 전형적으로 내보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른바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삶의 재현과 모사, 그리고 인식이 본질적으로 추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거나, 아니면 변두리적인 파편적 삶의 형태를 통해서 유추될 수밖에 없거나, 그것이 소설로써 전달되는 한, 작가의 작업은 그것들을 소통가능한 질료로써 변형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최수철은 아직까지 자신의 의식을 전달하는 적합한 비유체계를 형성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혹 그것이 의도적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번과 같은 그의 작업은 쉽게 수긍되기 어려울 것이다.
최수철의 작품세계는 데뷔 이후 지속적으로 이런 길을 고집하고 있다. 그는 세계를 보는 눈에서,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는다. 묘사라든가 소설 구성에 있어서의 그러한 새로움의 추구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업이지만, 동시에 그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많은 위험성을 내포한다. 어느 누구도 그 길의 적합성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발표된 그의 소설들이 소설과 소설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자주 드러내는 이유를 필자는 이런 각도에서 이해하는데, 그 낯선 과정에 대한 검증이 아직 완결된 것은 아닐 듯 싶다.

출판저널, 1992년 9월 5일


photo gallery

원작: 최수철
구성/연출: 오경숙

무대디자인: 오경숙
안무: 박호빈
영상연출: 구성우
영상촬영: 추광채
무대감독: 김낙형
사진: 권순미

   
 
 
 
 

 

   Repertory 1995 ~ 1999
10. <딕테>(Dictee)
9. <뮈토스의 사람들>
8. <리어 그 이후>
7. <벽화 그리는 남자>
6. <Overact>
5. <벽화 그리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