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공연 <말리나>(Malina)

2000. 7. 16-23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출연: 김담희
    강화정
    김현아
    김민정

제가 연극을 만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원래 연극의 본성인 ‘마술성’(magic)의 회복이며 그것은 동시에 현대사회의 잠들어 있는 인간들의 의식에 충격(impact)을 가하고, 마비되어 있는 그들의 감각(sense)을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전 연극의 마술성이라는 본질이야말로 물질화 되어가고 화석화되어 가는 이 20C말의 거대한 자본의 집중과 대중화라는 이름아래 관객들의 의식을 더욱 깊은 잠 속으로 빠뜨리고 그릇된 환상을 제공하는 많은 양의 공연형태들 속에서 그나마 제가 가치를 부여하고 도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자 패권주의의 세계경제 시장의 흐름 속에서 경제만능이라는 기치를 들고 달려가는 행렬 속에서 열등한 자들(?)이 유일하게 발언을 할 수 있는 곳은 다행하게도 아직은 연극이라는 믿음입니다.

전 연극의 마술성을 믿기 때문에 제가 작업을 하면서 만나는 장애들이 바로 제 창작과 창조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고정된 연극을 미리 상상하고 그 연극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어떤 의미로는 전 연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가 과연 어떤 연극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 ‘발견’에 의미를 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연극이라는 양식을 만들기 위한 기본 조건들은 제가 그 동안 연극을 하면서 깨달은 바로는 결코 마련하지 못할 조건들이기 때문에 전 어쩌면 ‘절망의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록 결핍의 상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저와 만나는 연극 텍스트와, 공간과 시간, 그리고 배우들은 양쪽 모두 무한히 자유롭고, 서로가 상대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각자의 존재와 상대들의 존재를 허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어느 누구의 권력도 자리하지 않는 연극이라는 ’비현실성‘속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가장 강력한 모습의 ’연극적 reality'가 나타나는 순간이, 바로 연극의 magic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더구나 이토록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하고, 그 어떤 하나의 삶의 양식을 모델로 삼을 수 없는 이 시대에 연극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역시 순수에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범람하는 물질과 정보의 대홍수 속에서 그나마 그 어떤 다른 물성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치는 역시 인간의 의식과 그 정신을 담은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1C에 들어서는 인간 문명의 역사는 어쩌면 대전환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문명의 극단화가 만들어 낸 아주 제한되고 한정된 삶의 양식 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전 차라리 아주 오래 전의 가치인, 최소한의 물질을 사용하고 그리고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배우의 몸이 가진 순수성의 회복에서 대안을 찾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몸의 모습이 비록 오래 전 상상하던 그러한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현대의 질주하는 정신의 속도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상처 나고 분열되어진 그래서 파편화된 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한 몸의 억압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무대 위에서의 배우의 몸은 분열을 경험하고 몸의 부재, 즉 죽음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배우와 함께 하는 무대 위의 공간과 시간은 절대로 통념적인 의미의 극적 환상을 제공하는 한정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차라리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특정한 것을 지시하지 않는 것’이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그러므로 전 최소한의 물질을 동원하고 그리고 제 연극에 우연으로(하지만 irony하게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등장한 그 사물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며 배우들의 몸과 만나지는 그 충돌의 순간이 바로 magic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충돌이 일어나는 순간의 충격(impact)과 감각(sense)의 환기는 일상적인 것들을 낯선 모습으로 만나는 일에서 출발합니다. 전 지금의 여러 다양한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는 듯 해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삶의 형태가 물질 중심적이고 결국은 권력 지향적인 현대사회에서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의 정치적 제안이나 도덕적, 더 나아가서 예술적 제안을 내놓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연극을 통해서 각자가 자신이 고민하는 현실과 예술의 문제를 모색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전 ‘어떤 이름이 붙여질 수 있는’ 상품의 연극을 생산하기보다는 ‘그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연극을 발견해 보려는 것입니다. 낯익은 일상들을 낯설게 만나는 것은 이 거대해진 문명이라는 괴물 안에 아주 하찮은 그리고 사소한 자리로 자리잡은 많은 대다수의 인간들의 자신을 둘러싼 그 인간 조건의 실상인 부조리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적 순간 일 겁니다. 고전적 의미의 비극이 아닌. 그러한 철학을 담아내는 현대연극의 형태는 이미 몇몇의 현대 연출가들에게서 무대언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상을 낯설게 하기 위해서 동원되어진, 배우의 몸의 언어들의 변형들에서 보여지듯이 저도 특별히 몇몇의 요소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우의 사물화와 사물의 인격화, 음성의 시각화와 동작의 언어화, 그리고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 배우와 인물과의 관계 등에서 통념적인 시청각적 기호전달의 전복을 통해 수동적인 관객들의 의식을 깨우고, 화석화된 그들의 감각을 재 환기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배우는 때로는 온전한 소리의 저장고로서 자신을 의식과 몸의 이중자아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혹은 그에 도발하는 시각적 이미지로서 자신의 거추장스러운 의식을 몰아내고 온전한 몸의 본질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우 의식의 지점이 한 곳에 고정된 무엇으로 남아 있기를 거부하며 끊임없는 자기모순과 자기배반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연극의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연극과 타 장르와의 만남에서는 미술, 음악, 혹은 영상의 등장이 단순한 배경으로의 적용이 아닌 그 자체로 완성된 자기언어를 갖는 적극적인 개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상이나 미술, 음악의 존재가 관객과 배우의 극적 환각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허구를 드러내는 독립적인 미학적 성명이어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현대연극 언어, 특히 배우의 몸의 언어는 결국 잃어버린 순수에의 기억(아름다움, 혹은 예술), 삶과 인간 조건의 부조리(irony)와 모순(paradox) 그리고 그에 따른 자기 조롱(grotesque), 그리고 절대로 포기되어질 수 없는, 완전한 삶을 향한 욕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절망의 미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잉게보르크 바흐만(Ingeborg Bachmann)은 1926년 6월 25일 오스트리아 캐른튼 주의 수도인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나 잘츠부르크, 그라츠, 빈, 뮌헨, 베를린, 뉴욕, 로마 등지에서 작가로서의 화려하고 전설적인 삶을 살다, 1973년 9월 26일 오랫동안 살았던 로마에서 화재로 인해 사망하였으며, 클라겐푸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는 언젠가 작가로서의 삶을, 사회적이지 못하고 외롭고 저주받은 독특한 존재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녀 문학의 주제는 언제나 한 사람과 한 시대, 혹은 한 사회의 정신, 즉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아닌 내면구조였다. 그리고 그 같은 구조 속에서 고통 당하는 개인들의 내면이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공공연히 문학의 죽음이 선언되었을 때, 그녀는 1952년 47그룹 모임에서 파울 첼란과 함께 시를 낭송함으로써 전후문학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는 극단의 찬사와 함께 독일문단에 데뷔하였다. 이후 그녀는 대표적인 남성세계인 문단에서, 작가로서보다는 여자로서 그녀를 흠모하는 남성 비평가들과 신문, 방송매체에 의해 신화화되고 살아있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시에 매료되었던 문학비평가들은 “말리나”의 주인공 ‘나’에게 불행에 관한 어두운 책이 아니라 ‘아름다운 책’을 쓸 것을 요구하는 이반처럼, 그녀가 시에서 산문으로 몸을 돌리게 되고 더 이상 아름다운 시를 쓰지 않는 것을 용서하려 들지 않았고, 초기부터 일관되게 그녀의 시와 산문을 관통하는 혹독한 시대 비판과 사회- 및 문명에 비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같은 폭력적인 몰이해를 눈앞에 하고 인생의 위기를 겪어야 했지만, 바흐만은 그러나 ‘대대적인 살인전시장’으로서의 사회의 본질을 밝히려는 노력을 지속했다. 그녀에게 글이란 존재방식이고, 무엇을 어떻게 쓰느냐는 전략적인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10여 년간 바흐만은 “죽음의 방식들”이라는 제목 아래 3부작 연작소설을 준비했는데, 그 중 “프란차 경우”와 ”화니 골드만을 위한 레퀴엠“은 미완성으로 끝나고, 오늘 한국 무대에 처음으로 연극 작품화되어 소개되는 소설 ”말리나“만이 유일한 완성작으로 1971년에 출간되었다. 바흐만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프란차 경우“를 3부작의 서곡으로 소개하면서,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해되고 있다고, 우리의 감각이 아닌 우리의 정신을 흔들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뒤흔드는 범죄가, 내면세계를 무대로 한 피를 흘리지 않는 대대적인 도살이 사회적 도덕의 허용된 틀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고 하였다. 연작소설에서 그녀는, 인생의 모든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내면에서 정신세계의 어떠한 구조들이 한 정신을 죽음으로 몰아가는지를 표현해 내고자 하였다.

바흐만은 "말리나"를 일종의 총보처럼 썼고, 작품의 처음은 마치 연극작품의 대본처럼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처음에 먼저 등장인물들이 소개되고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다. 소설은 1장 "이반과 행복하게", 2장 "세 번째 남자 ', 3장 "마지막 일들에 관하여'로 이루어져 있다. 편지글, 동화, 전화통화, 인터뷰, 악보, 대화, 독백, 에피소드, 꿈의 장면들이 언뜻 두서없이 산만하게 모자이크처럼 엮어져 있는데, 모든 장면들과 이야기들이 꼭 같이 현재적 가치를 지니고 병렬적으로 묘사된다. (시간은 '오늘')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총합은 다분히 독백의 성격이 강하고, 실제로 바흐만은 이 작품을 일컬어 ‘깊은 밤 시간, 의미 없이 부산스런 낮 시간의 노예생활에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을 때 생겨나는 독백들’이라 하였다. 사건의 전후 없이 나열되는 다양한 장르의 단편적인 장면들은 광기에 휩싸인 주인공 ‘나’의 분열된 자아들이고, 자기 존재의 기억된 편린들이다. 바흐만에게 삶은 질병이었고, 그녀가 진단해 낸 우리 시대의 병명은 정신분열증이었다.

“말리나”는 여자이며 작가인 ‘나’가 일상적인 남녀관계와 문학세계, 그리고 그 밖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다양한 형태로 폭력적인 힘을 행사하는 남성적 논리와 이성에 대립하는 모습과, 결국 사랑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 ‘오늘’, 여성적 주체성을 남성적 분신인 말리나에게 양도하고 세상과 결별하고 이성의 세계와 결별하기까지의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스런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등장인물은 크게 ‘나(Ich)'와 이반(Ivan)과 말리나(Malina)이다. ’나‘는 여자이고 작가이다. 이반은 ’나‘와 한 골목에 살며, 부산스럽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며, ’나‘가 첫눈에 반한 사랑이며, ’나‘가 그 동안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훼손되고 파괴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혼신을 다해 고대하는 메시아와 같은 존재이며,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성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작가로서의 창조적인 정신을 무시하고 그녀의 외양에만 신경 쓰며, 그녀가 필요할 때만 잠깐씩 들를 뿐이고, 그에게 ’나‘ 는 머리에 든 것이 하나 없는 어리석고 무능력한 결핍투성이 일 뿐이다. ’나‘는 이반을 통해, 불가능했던 언어생활이 다시 가능해지고, 무너졌던 단어와 문장과 문법체계에 새로이 든든한 뼈대가 구축되고 근육이 생겨나기를 고대했으나, 그들 사이에 가능한 대화는 온통 피곤하다는 문장이나, 이반이 ’나‘를 훈계하거나 야단치는 문장, 혹은 명령하는 문장들뿐이고, 감정을 토로하는 문장만은 결여되어 있다. 순전히 일방적으로 이반이 ’나‘의 존재와 그녀의 여성성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나‘의 본질, 특히 지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적 능력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문장들로 가득하다.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토막 난 전화 문장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아름다운 완성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지배-피지배의 불평등한 불구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반은 타산에 능하고 사랑에 무능력하다. 두 사람이 두는 장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에게 사랑은 유희이며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나’의 퀸의 부동성은 전통적으로 남자 앞에서의 여자의 상태를 암시한다. 그에 반해 ‘나’는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고 직접적이며 타산에 무능하고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이나 유희가 아니라 삶이며, 이분화 된 정신세계의 불완전함을 넘어선 온전한 자유의 상태를 갈구한다. 이성과 감성, 예술과 철학, 육체와 정신, 언어와 세계, 사회와 개체로 이분화된 것들이 서로에게 흘러들어 사랑이 완성되고, 분리된 남성성과 여성성이 불평등 관계를 극복하고 온전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성이 되기를 병적으로 소망했던 ‘나’는 이반과의 사랑이 불가능함을, 그럼으로써 그녀를 굴욕스럽게 했던 이반으로 부터의 이별이 진행중임을 알고 있다. “말리나”는 ‘순수가 불필요해진’ (니체) 시대의 ‘사랑의 (장렬한) 몰락’ (니체)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반과의 이별이 진행되면서, ‘나’와 이반과의 관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체험된 역사적 맥락의 가부장적 정신구조 및 사회구조가 다양한 아버지의 성폭력적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 그녀의 언어를 탈취하려 하고 그녀의 창조적인 능력을 억누르고 사장시키려 위협했던 오랜 사회적 관습, 아버지가 쓴 듀엣 곡에는 애당초 남자의 역만 들어 있고, 여자의 목소리로 부를 수 있는 그녀의 파트는 들어 있지 않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말리나와의 심리 분석적인 대화를 통해 살인자의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정체를 밝혀 가는 동안 ‘나’로서는 말리나와의 이별 또한 자명해져 간다. 예술가로서의 그녀의 여성적 주체성이 사회를 지배하고 역사를 지배해 온 아버지의 율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부수적이고 결핍되고 불필요한 존재로 잊혀져 온 Eros의 세계를 대변한다면, 말리나는 Logos의 세계를 인격화한 것이고, 그녀는 문학세계에서 여성성이 수용되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석적이고 냉정한 말리나식의 이성적 글 쓰기, 즉 남성적 글 쓰기만 생존할 수 있을 뿐, 그녀의 여성적 글 쓰기, 광기의 미학을 위한 자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한, 그녀는 자기 식의 글 쓰기와 사유- 및 체험방식을 말리나에게 모두 양도하고 ‘이곳’과의 이별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침내 그녀가 오래 되고 단단한 남성적 정신세계의 벽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말리나와 ‘나’의 분열은 최종적인 것으로 고착화되고, 그녀의 죽음, 곧 그녀의 언어적 실존이 침묵하게 되는 과정은 결국 이반과 말리나, 아버지와 아버지의 모습을 한 어머니와 수많은 자매들이 공모해서 이루어 낸 살인인 것이다.

전통적인 소설 기법과는 달리, 서술적인 측면이 약하고 수많은 에피소드의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영상미가 뛰어나고 언어 및 음악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이 작품의 경우 어떤 형식보다도 연극무대에서 가정 그 메시지와 효과가 잘 나타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들어 독일어권 문학에서 여성문학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말리나”가 발표되었을 때, 남성 비평가들은 다만 ‘불행한 사랑 이야기’쯤으로만 생각했으나, 지난 30여 년간에 걸쳐 바흐만이 복합적이고 강도 높게 비판한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문화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맥락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동안 이제는 독일어권 여성문학의 선구자로 자리를 굳힌 상태이다. 이번 무대를 통해 우리는 바흐만이 당시 그려낸 여자/예술가의 정신 및 표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가 ‘오늘’도 유효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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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잉게보르크 바흐만
번역: 박영구
구성/연출: 오경숙
드라마투르그: 신교춘

무대디자인: 오경숙
무대디자인협력: 박장렬
조명디자인: 김철희
의상디자인: 이신옥
분장: 김성희
무대감독: 안태랑
무대감독보: 주유진
무대제작: 김영직
사진: 권순미
기획: 신현실
기획보: 홍주영
진행: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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